
몇 달 전에 케이블TV의 어떤 채널에서 밤늦게 상영하는 방화 한 편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흥미진진한 내용이었지만 처음의 십여 분 정도를 보지 못했었기 때문에 동네의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테이프를 대출해서 열흘쯤 전에 다시 한 번 보게 됐다.
구프로는 500원에 대출해 주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보더라도 부담없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이 아직 통일되기 전에 동독의 북한 대사관에서 일하던 북한 사람인 림병호(한석규 분)가 서독으로 망명을 한다.
그는 한국의 정보부에 넘겨져서 고문을 받으며 망명을 한 진짜 이유에 대해 심문을 받는다.
그러다가 그를 믿게 된 정보부에 의해 북파 공작원을 교육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고 고정간첩인 라디오 방송국의 DJ, 윤수미(고소영 분)와 접선하게 된다.
두 사람은 당의 지시대로 연인 사이가 되는데 림병호가 교육한 북파 공작원을 실은 배가 북한 배와 충돌하여 북파 공작원들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정보부에서는 북파 공작 업무에 대해 잘 아는 누군가가 보안을 유지하지 못해서 기밀이 누설된 것으로 보고 기밀의 누설 원인을 캐게 된다.
그 와중에 윤수미에게 북에서 지시가 내려오는데 그것은 림병호를 희생양으로 삼는 공작이라서 이미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윤수미는 이 지시를 림병호에게 전하지 않는다.
다른 공작원과 접선하여 자신이 당으로부터 의심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림병호는 윤수미를 윽박질러서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이 남과 북의 양쪽에서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남에서 암약하던 고정간첩의 우두머리(송재호 분)가 잡히게 되고 그와 함께 접선하던 윤수미도 몽타주를 만들어서 수배하기에 이르는데 이 와중에 해외 유학생 중에 호기심으로 동베를린으로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갔다 온 한 유학생이 귀국길에 공항에서 정보부원들에게 체포된다.
국민들을 안보 논리로 통치하려는 정부의 희생양을 만들기 위한 정책에 의해 림병호는 이 유학생에게 자신이 지내던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의 위치와 내부 구조, 당원증 등을 보여 주고 이 유학생은 정보부의 무지막지한 고문에 자포자기하여 림병호가 흘려준 정보대로 허위로 자백할 수밖에 없게 된다.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에서 공산당에 입당하여 고정간첩이 됐다는 허위 자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유학생의 허위 자백 내용을 담은 녹음 테이프를 몰래 들은 그는 그 유학생이 자신을 고정간첩의 행동책이라고 허위 자백하는 녹음 내용을 듣고 자신이 북에서 뿐만 아니라 남에서도 용도 폐기될 운명임을 알게 된다.
그는 일전에 자신에게 접근해서 명함을 건네줬었던 서양의 언론인에게 최근의 해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은 조작이라는 진실을 알려 주고 그 댓가로 브라질로 가는 타인 신분의 여권 두 장을 받고 윤수미와 함께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브라질로 도피한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은 브라질에서 신분을 숨기고 살면서 윤수미는 임신을 하게 되고 림병호는 부두에서 잡부 노릇을 하며 나름대로 평범하고 성실한 가장으로서의 삶을 소박하게 영위하려는 의욕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외딴 도로에서 자신이 타고 가던 차가 고장이 났다면서 자동차 정비를 부탁하던 한 흑인 살인 청부업자에게 총을 맞고 비명횡사하고 만다.
이런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윤수미는 부른 배를 내민 채로 발코니에 앉아서 림병호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뿐...
전편에 걸쳐서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의 애잔한 선율이 울려 퍼지고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25번의 비장하고 음산한 선율이 불행한 결말에의 복선을 깔고 흐르는 영화였다.
분단된 조국에서 태어난 한 인재가 분단이라는 참혹한 현실 때문에 형편없이 망가지고 결국 허망하게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은 과연 누구의 탓이란 말인가.
개인을 국가라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과 부품으로만 보는 추악한 파시즘과 냉전 논리, 이제는 이런 우매함을 넘어설 때는 한참 전에 지났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영화였다.
국가라는 조직은 과연 한 개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와야 하는 것일까?
독재 정권은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려고 하면서 국민들에게는 극단적인 희생과 누명을 쓰고 죽기까지 강요하는 봉건주의의 폭군 논리를 당연시하고 있다는 것은 섬뜩한 일이다.
봉건주의 치하에서도 훌륭한 군주 치하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이 아닌가.
아무튼 재미있게 봤고 유달리 고전 음악의 선율이 많이 흐르는 이 영화에서 한국인, 아니 한반도에서 한민족으로 태어나 뿌리를 박고 사는 사람이기에 느껴야 하는 비애가 가슴을 사무치게 했다.
이런 감정을 아무리 약소국이라 할지라도 분단되지 않은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한민족이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갈등이 참으로 어리석고 피를 말리는 수치스러운 자기 소모전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자괴심을 느끼며 민족적인 자의식에 빠져 본다
참고로 이 영화는 2005년의 연말에 보고 감상문을 써 놓았었던 것임을 이 자리에서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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